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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가 피로 물들다! 왕좌를 향한 영국의 내전, 장미전쟁

너재밌 2025. 4. 16. 17:05

 


15세기 영국. 전쟁이 끝났지만 평화는 오지 않았습니다. 백년전쟁이 막을 내린 후, 영국은 외부보다 더 큰 내부의 적과 싸우게 됩니다. 그 중심에는 두 개의 가문,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이 있었습니다.

이 두 가문은 모두 왕실의 혈통을 이어받은 귀족 가문이었고, 각각 붉은 장미(랭커스터)와 하얀 장미(요크)를 상징으로 사용했죠. 그래서 이 내전을 사람들은 훗날 장미전쟁(Wars of the Roses)이라 부르게 됩니다.

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이 싸움은 무려 30여 년(1455~1487)간 이어졌고, 수많은 귀족과 왕족이 죽음을 맞이했으며, 영국 왕실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같은 왕족끼리 이렇게 격렬하게 싸우게 된 걸까요?



1. 전쟁의 배경 : 약한 왕, 흔들리는 권력

 



장미전쟁의 배경은 생각보다 복잡하지만, 시작은 하나입니다. 당시 왕이었던 헨리 6세의 무능함이었습니다.

그는 랭커스터 가문 출신의 국왕이었지만,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고 성격도 매우 소극적이고 병약했어요. 게다가 정신병 증세까지 있었다고 알려져 있죠. 당연히 정치력도 부족했고, 나라를 안정적으로 이끌지 못했습니다.

그 틈을 타서 요크 가문의 리처드 공작이 나타납니다. 그는 왕의 친척이자 군사적 실력도 갖춘 인물이었고, 무능한 헨리 6세 대신 자신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때부터 왕실 내 정치적 긴장이 커지기 시작했고, 결국 1455년 ‘세인트앨번스 전투’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됩니다.

 

 

 

2. 피의 순환 : 전투와 암살, 그리고 왕위 쟁탈

 


장미전쟁은 단 한 번의 전투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요크 가문이 승리하면 랭커스터 가문이 반격하고, 랭커스터가 복귀하면 요크가 다시 일어나는, 그야말로 왕좌를 둔 무한 루프였습니다.

가장 유명한 사건 중 하나는 요크의 리처드 공작이 전사하고, 그의 아들인 에드워드 4세가 다시 왕좌를 차지한 일입니다.
이때부터는 요크 가문이 잠시 승기를 잡았지만, 상황은 여전히 불안정했죠.

에드워드 4세 사후, 어린 아들 에드워드 5세가 왕위에 올랐지만, 그의 삼촌 리처드 3세가 조카를 제거하고 왕위에 오릅니다. 이 사건은 후에 ‘탑 속의 두 왕자’라는 미스터리로도 알려져 있죠.

하지만 리처드 3세의 통치도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그의 권력을 끝낸 인물이 바로 헨리 튜더, 훗날 헨리 7세입니다.

 

 

 

 

3. 전쟁의 결말 : 튜더 왕조의 시작

 


1485년, 보즈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는 전사하고, 헨리 튜더가 헨리 7세로 즉위하면서 장미전쟁은 마침표를 찍습니다.

헨리 7세는 랭커스터 가문의 후손이었지만, 전쟁을 완전히 끝내기 위해 요크 가문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합니다. 이로써 두 가문이 하나로 통합되며, 튜더 왕조가 새롭게 시작됩니다.

헨리 7세는 이후 나라를 안정시키고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며 영국이 근대 국가로 발전할 기반을 다지게 되죠.


 

 

 


장미전쟁은 단순한 왕위 쟁탈전이 아니었습니다. 무능한 통치, 권력 다툼, 귀족들의 이해관계가 얽히며 수많은 전투와 암살, 배신과 복수가 이어졌던 시대였죠.

하지만 이 전쟁이 끝난 뒤 영국은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왕은 단지 혈통만으로 존재할 수 없고, 정치적 능력과 국민의 지지가 필요하다는 점

귀족 중심의 통치에서 벗어나 중앙 정부가 힘을 가져야 한다는 구조


장미전쟁은 피와 복수의 시대였지만,  그 끝엔 통합과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분별한 권력 다툼은 국가 전체를 위태롭게 만든다는 교훈

그리고 이 전쟁의 마지막 승자인 헨리 7세의 아들, 헨리 8세,그리고 손녀인 엘리자베스 1세에 이르기까지,
튜더 왕조는 이후 영국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안정된 시기를 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