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경제는 왜 100년 뒤처졌을까? 백년전쟁 이후 유럽 각국 경제 비교
영국과 프랑스는 14세기부터 15세기까지 이어진 백년전쟁이라는 긴 갈등을 겪었지만, 전쟁 이후의 경제 회복 속도는 극명하게 갈렸습니다.
영국은 자본주의적 경제 구조로 서서히 전환되며 산업화의 기반을 쌓았지만, 프랑스는 여전히 봉건적인 농업 중심 경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왜 같은 전쟁을 겪었는데도 결과는 이렇게 달라졌을까요? 이 글에서는 영국은 어떤 경제 구조를 형성했고, 프랑스는 왜 실패했는지, 그리고 독일·이탈리아의 경우는 어땠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봅니다.
1. 영국은 왜 앞서갔나?
자본과 기술의 조기 축적
영국은 15세기 이후 농업에서 양모 산업 중심의 상업화가 이루어지며 자본이 축적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부르주아 계층과 상공업자들이 경제를 주도했고, 중세적 장원제에서 탈피해 자유로운 고용과 거래가 가능해진 시장경제가 자리 잡았습니다.
엔클로저 운동
농촌 지주들이 목축업을 중심으로 대규모 토지를 개인 소유로 전환하며 농민들의 도시 이주가 촉진되었습니다. 이 노동력은 초기 산업화의 기반이 되었고, 농업에서 공업으로의 전환이 가능하게 만든 핵심 요인이었습니다.
해외 무역과 해양력 강화: 16세기부터는 해상 강국으로 성장하며, 무역·식민지 확장을 통해 자본 유입과 경제 다변화에 성공합니다.
2. 프랑스는 왜 정체되었는가?
봉건적 농업 경제 구조 유지: 전쟁 이후에도 귀족 중심의 대농장 운영과 봉건적 작물 생산 체계가 유지되었고, 자본이 농업 내부에서만 순환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공업과 상업으로의 발전 기반이 매우 미약했습니다.
국가 중심 정치와 규제: 프랑스는 중앙 집권형 왕정 체제를 유지하면서 상업 활동과 금융 활동에 과도한 통제를 가했습니다. 길드(Guild) 같은 폐쇄적인 조합 구조도 자율 경제를 제한하는 요인이 되었고, 상공업의 발전을 가로막았습니다.
부르주아 계층의 등장 시기 지연: 프랑스에서는 16세기 후반 위그노 전쟁을 겪으며 신흥 상공 계층이 겨우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지속적인 내전과 귀족 중심 정치로 상공업이 성장할 공간 자체가 없었습니다.
3. 독일과 이탈리아는 어땠을까?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의 푸거 가문,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등 상업 귀족들은 금융과 무역에서 한때 번성했지만, 도시 국가들이 각각 독립적이고 분열된 정치 체계로 인해 지속적이고 통합된 경제 성장에는 실패했습니다.
폐쇄적 길드 체계 유지: 이 지역들도 자유로운 상업 경쟁이 아닌, 특정 가문과 조합의 독점 구조가 강하게 남아 있었으며, 이는 장기적 성장 동력의 약화로 이어졌습니다.
근대국가로의 전환 실패: 영국과 달리 중앙집권적 국가 구조가 형성되지 못했고, 이로 인해 자본주의적 정책이나 인프라 정비가 국가 단위에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전쟁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이후를 준비한 구조와 계층입니다.
영국은 민간 중심의 자본 축적과 도시화, 자율적 무역 구조를 통해 산업 혁명으로 가는 디딤돌을 일찍이 마련했습니다.
반면 프랑스는 귀족 중심의 농업 체제와 정치 중심 경제 운영으로 인해 17세기 이후에도 상업 발전이 더뎠고,
독일·이탈리아는 도시마다의 경쟁과 정치 분열로 인해 국가 단위의 경제통합이 어려웠습니다.
📌 결국, 백년전쟁 이후 경제 회복의 차이는 누가 '민간의 자율성과 상업의 자유'를 먼저 확보했는가에서 갈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